한 단어로 본 문화 차이 – ‘시간’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
1. ‘시간’이라는 개념, 정말 같을까?
우리가 ‘시간’을 하나의 절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서양식 사고방식의 영향이 큽니다. 하지만 언어를 조금만 넓게 살펴보면, 시간은 결코 하나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어떤 언어는 시간을 ‘선형(linear)’으로 보고, 어떤 언어는 ‘순환(cyclic)’으로 이해합니다. 심지어 어떤 언어에는 ‘미래’라는 구체적 단어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은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남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중 하나인 아이마라어(Aymara)를 비교하며, 한 단어가 어떻게 문화를 비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영어 – 시간을 ‘흐르는 강’으로
영어의 ‘time’은 흐르는 강처럼 앞에서 뒤로 향하는 선형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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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Time flies like an arrow.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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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We are running out of time.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 비유들은 시간을 ‘유한한 자원’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시간 관리(time management)**라는 개념이 발달했고, 효율성·속도·기한(deadline)을 중시하는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시간을 낭비한다(waste time)”라는 표현도 이 사고방식의 산물입니다.
3. 프랑스어 – 시간은 ‘기회와 순간’
프랑스어의 ‘temps’는 ‘시간’이자 ‘날씨’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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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Le temps passe vite. (시간이 빨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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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Quel temps fait-il ? (날씨가 어때요?)
날씨와 시간을 동일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시간 역시 날씨처럼 변화무쌍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줍니다. 또한 프랑스어에는 ‘l’occasion’(기회)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는데, 이는 ‘좋은 타이밍’을 중시하는 문화와 연결됩니다. “기회를 잡다”(saisir l’occasion)는 단순히 시계의 초침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상황과 분위기를 포착하는 행위입니다.
4. 아이마라어 – 과거가 앞에, 미래가 뒤에
볼리비아·페루 등 안데스 지역의 아이마라족은 독특한 시간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마라어에서 ‘nayra’는 ‘앞’과 ‘과거’를, ‘qhipa’는 ‘뒤’와 ‘미래’를 뜻합니다. 즉, 과거는 이미 ‘눈앞에 보이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보이지 않는 뒤쪽’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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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nayra mara (앞의 해 → 지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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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qhipa mara (뒤의 해 → 내년)
이 사고방식은 우리가 무심코 전제하는 시간 방향성을 뒤집습니다. 영어·한국어에서는 미래를 ‘앞으로 다가온다’고 하지만, 아이마라족은 과거를 더 확실하고 ‘앞에 있는 것’으로 봅니다. 불확실한 미래는 뒤에 있어, 등 뒤에서 다가옵니다.
5. 언어 속 시간관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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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시간은 흐르는 자원 → 관리·속도·효율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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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시간은 기회와 날씨 → 변화, 타이밍, 분위기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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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마라어: 과거가 앞에, 미래가 뒤에 → 확실성 중시, 신중함
이 차이는 단순한 어휘가 아니라, 삶을 계획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영어권에서는 미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아이마라어 문화권에서는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를 확실히 하고, 미래는 비교적 열어두는 경향이 강합니다.
6. 마무리 – 단어 하나로 보는 세계
한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그 사회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 ‘단어 뜻’만 외우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단어가 문화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까지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사전에는 없는 ‘사람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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